복학생 현은 졸업 영화 제출 기한을 앞두고 있다. 다들 최종 마스터링 작업 중인데 아직 촬영분이 남은 건 졸업반을 통틀어 현 뿐이다. 현은 영화를 찍기 위해 일 년을 팝콘을 튀기며 야간 알바를 했다.

오늘은 현이 고대해 온 마지막 씬 촬영일이다. 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수십 번도 넘게 확인한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했다. 날씨는 괜찮을 것이다. 소품 리스트도 다시 확인했다. 빠진 건 없다. 오늘의 장소인 대교 인근 교통상황도 시간 단위로 알림이 오도록 설정해 두었다. 계획한 대로 이 씬을 찍고 편집해 끼워 넣으면 된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완성돼 있다.

현과 동고동락해온 동기, 후배들로 이뤄진 스탭들은 이 보충 촬영을 앞두고 돌림 노래처럼 이상하게 “불길한데?” 농담을 해왔다. 소품으로 점찍어둔 거울이 깨진다거나,  삼 일 연속으로 까마귀를 마주친다거나, 식사 기다리며 본 타로에서 현을 포함한 헤드스탭 모두 "파괴", "파멸", "죽음" 카드가 나온다거나… 그럴 때마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불길한데?” 라고 외치는 것이다.

현은 미신을 믿지 않기도 하고 더욱이 4학년 때까지 여기저기서 구른 짬도 있는데, 그런 근거없는 징크스에는 겁도 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 만큼 이런저런 돌발 상황도 임기응변으로 돌파할 자신도 있었다. 걔들이 그럴 때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비타민이나 손 선풍기를 보내주거나 빙수를 한 그릇씩 사먹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프리랜서 모델 채는 2주 전 현에게 차였다. 채는 현이 좋았지만, 현이 잠시라도 자신을 불안하게 내버려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채는 약 9시간 정도 연락이 되지 않은 현을 용서할 수가 없어 그와의 모든 채널을 모조리 차단해버렸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채는 반나절 만에 다시 차단을 풀고, 여러가지 채널에 쌓여 있을 현의 공손한 사과, 메시지 등을 기다렸지만 아무 기척도 없었다. 채는 그걸 또 믿을 수 없어 차단하고, 몇시간 후 다시 해제하고를 반복하며 현의 동태만을 살폈다.

채는 기다리다 못해 다음날 현에게 전화를 했지만, 현은 싸늘한 문자(“왜 이제 와서?”)만을 남겼고, 채는 그제서야 구구절절 사과를 했지만 현은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문자만을 보냈다. 채는 그런 냉정함이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자비 없이 변명할 기회도 없이 차버린다고?

채는 데이트할 때 호프집에서 현이 설명했던 보충 촬영 계획을 상세히 기억했다. 현이 이 영화를 위해 언제부터 준비했고, 가족들로부터 돈을 얼마나 빌렸으며, 시덥잖은 알바를 하면서 몸의 어디가 상했고, 스탭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그렇게 준비한 끝에 영화는 대부분 완성했고, 마지막 장면만 찍어 완성하면 된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마음에 들게 편집까지 마쳤기에 나름 기대가 된다던 현의 말. 현이 온 서울을 돌아다니며 찾았다는 그 장소와 촬영 날짜까지 채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채는 설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충동적인 실수”를 하게 됐는지 변명이라도 하고 차이고 싶었다. 자신의 역사깊은 불안장애와 이유있는 통제벽에 대해 설명이라도 하면 혹시나 현이 참작해주리라는 희망도 있었다.

게다가 채의 자존심은 자신감과 뒤얽혀 2주간 이상한 변종으로 자라났다. 현이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전화나 메시지로 사과하는 것보단 일단 만나서 해결을 보면 현은 용서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직감이 채를 계속 부추겼다. 현의 보충 촬영일에 그곳으로 가면 현은 분명 환영해 줄 거라고. 채는 그건 분명 최악의 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채의 손가락은 폰으로 그날의 일정을 모두 비우는 중이었다.

다시 오늘, 현의 촬영 날. 오늘의 촬영은 녹록치 않다. 인물이 대교 위 인도를 걸어오는 씬의 내용과 연기,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워킹, 날씨, 행인들 통제까지. 지도교수도 현에게 한두 가지라도 좀 수월하게 수정해 찍으라고 할 정도였다. 현의 스탭들은 오늘만은 약속한 듯 “불길한데?” 농담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소품 상자에서 뭔가가 쏟아진다거나, 커피가 터진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잔해들을 흔적도 없도록 조용히 수습해냈다.

현의 충직한 조연출 경은 대교 아래 한강공원 주차장 근처에 혼자 남아 무전기를 든 채 배우를 기다리고 있다. 경은 한동안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연락과 일처리를 하고, 시계를 봤다가 모자를 고쳐 쓰기도 하며 알뜰히 시간을 보내다가 멀리서 오는 배우 준을 바로 알아보고 크게 손을 흔들어 안내한다. 배우 대기용으로 이미 다 준비해둔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괜히 한번씩 들썩여보며 높은 목소리로 준을 맞이한다.

호리호리한 인상에 눈썹이 진한 준은 까딱 목인사를 하고 걸어온다. 경은 준이 오는 걸 보며 침을 한 번 삼킨다. 준은 현과 관계가 좋지 않다. 준은 현이 감당하지 못할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이 엔딩의 내용을 계속 바꿨고, 여러가지로 시간이 없다며 대화할 기회도 거의 주지 않았다. 의상이나 분장 같은, 배우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일절 코멘트도 없어 준이 일일이 연락해 질문해야만 답장을 줄 뿐이었다. 준은 현에게 “나 좀 신경 써 줘”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만 뺀 모든 방법을 통해 현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