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은 지금 구식 볼링장의 카운터 안에 서 있다. 힙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스포츠센터 볼링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천장은 백색 형광등, 온 벽면은 밝은 옥색과 미색 페인트로 통일되어 있다. 무엇도 숨기기 어려울 것처럼, 치과나 미용실처럼 유독 밝아 보인다. 카운터 너머 뒷벽, 그러니까 주현의 뒤로는 대여용 볼링화 선반이 붙박이로 늘어서 있고, 그 주변에 전자시계(아파트 부녀회 기증), 분실물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상자, 볼링화와 레인 대여 시간에 대한 규칙 안내 등이 살뜰하게 붙어 있다. 카운터 아래로는 대여용 서류 보관함과 포스트잇 메모, 구식 컴퓨터 등 잡다한 사무용품들이 놓인 직원용 책상이 있다.

조금 큰 남색 셔츠 유니폼을 입은 주현은 카운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들릴듯말듯한 말소리를 듣고 그에 따르듯 직원용 의자에 앉는다. 잠시, 뭔가를 기다리는 듯 정자세로 눈만 내리깔고 있다. 곧 다시 뭔가 들리면, 카운터 책상에서 일어난다. 뒤를 돈다. 붙박이 선반 쪽을 향해 몇 걸음 걷는다. 다시 상체만 돌려 레인 쪽을 멀리 돌아본다. 뭔가를… 발견한다. 급해진 손이 의자를 끌고, 책상 앞에 앉는다.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뭔가를 입력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올려 알림을 확인한다. 대조하듯. 말은 없이. 컷. 주현만 잘 하면 되는 테이크였다. 동선에 따라 포커스를 조절할 거리와 타이밍, 조명, 마이크의 적정 거리까지 모두 계산된 후였으므로. 그러니까 주현에게 수정이 요구될 것이다. 주현은 나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현이 “나름” 집중한 건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카운터 안에는 주현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구석에 꽤 큰 부피와 무게를 차지하는 검은 삼각대, 그 위에 얹힌 크고 검은 카메라가 있다. 그 뒤에 촬영감독 형구와 그의 퍼스트 치우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그들이 다루는 카메라에 연결된 선을 통해 카운터 밖의 촬영 스탭들이 주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현은 테이크가 끊긴 이유가 궁금하지만 잠자코 시작 동선으로 돌아가 앉는다. 감독 장희가 주현에게 다가와서 이것저것 말한다. 결론은 시간을 좀더 단축하면 좋겠다는 요청이다. 주현은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지만, 자세히 지켜보면 그건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보는 것 같다. 눈이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둘의 모습을 한 보 뒷선에 서서 지켜보는 형구. 그동안 그의 퍼스트 치우는 비좁은 카운터 뒤 공간의 잡동사니들을 딱 하나씩만, 소리도 없이, 포개고 치우는 것을 반복하며 형구가 다시 카메라 뒤 의자로 돌아오기 수월하도록 자리를 넓히고 있다.

곧 장희와 주현의 소통이 끝나고, 사람들이 각자의 시작 위치로 돌아간다. 두 번째 테이크. 주현이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시작 사인을 기다린다. 형구의 카메라 모니터 속 주현. 눈에 포커스가 맞는다. 이번에도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다. 액션 사인이 들리고 주현은 아까와 같은 순서로 움직인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뒤를 돌아 선반 쪽으로 가는데, 아까 두 걸음 반이었던 거리를 한 걸음에 가려다 미세하게 기우뚱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뭔가를 건너뛰는 듯한 행동이 이어지는데, 잘 안 맞거나, 삑사리가 난다. 모두가 망했다는 걸 직감한다. 당황했지만 이어가는 주현 뒤로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카메라와 삼각대와 형구와 치우가 모두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컷. 주현은 잠자코 시작 위치로 가서 앉는다. 장희가 큰 걸음으로 걸어온다. 주현은 아까보다 더 상체를 기울이고, 고개를 크게 끄덕임으로써 장희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역부족인 듯, 장희는 질문한다. 그냥 바로 문자를 확인하러 가는 걸로 하면 어려운 거예요? 이번에도 뒷선에서 듣고 있는 형구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떼지만- 그냥 숨으로 내쉬어 넘긴다. 팔짱을 끼고, 다시 한쪽 손에 턱을 묻는다. 비스듬히 선다. 짝다리. 주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무겁고 느리게.

얘기가 길어지자 카운터 밖의 스탭들이 각자 핸드폰이나 손목시계를 본다. 장희는 서둘러 코멘트를 마무리한다. “네, 이번엔 좀 더 짧게 갈게요.” 사람들이 다시 레디한다. 세 번째 테이크의 시작. 볼링장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은 주현의 왼쪽 정측면에 위치한 카메라. 카메라 뒤에는 형구. 형구의 왼쪽에는 치우. 셋은 모두 말이 없고, 시선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한다. 주현은 동선마다 정해진 곳을(사실은 허공인), 치우는 포커스 모니터를, 형구는 카메라 안팎의 주현을 본다. 그 외 스탭들은 모두 카운터 밖에서, 선을 통해 전달되는 영상과 소리를 보고 듣는다. 주현은 이번에도 유의미한 시간 단축에 실패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장희가 헤드폰을 한 손으로 벗고, 테이블에 놓인 담배갑을 탁탁 두드려 소리낸다.

조연출 도윤이 대신 끊는다. “컷 하겠습니다” 장희가 다시 카운터로 가고, 도윤이 몇 걸음 뒤로 뒤따라간다. 다시 아까처럼, 주현에게 장희가 말하고 있고, 그 사이로 한 보 물러나있는 형구의 구도. 이번에는 도윤이 카운터로 들어가는 좁은 틈에 서서, 모서리에 갈비뼈가 얹힐 정도로 배를 밀착하고 서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틈에도 하드보드지를 접어 흔들리는 의자 다리에 고이는 치우가 있다…

장희는 주현에게 말한다. 주현 씨, 방금까지 연기하신 과정을 말로 설명해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 주현은 수학 선생님 앞에서 칠판에 분필로 증명을 풀어서 해보여야 한다. 주현은 탑 위치로 돌아가 중얼거린다. 볼링화를 빌리려고 오는 걸 아니까, 미리 일어나서, 선반 쪽으로 가려고 뒤를 돌았는데, 그 뒤 레인에서 실종 전단에서 본 얼굴이 보여서, 일단 다시 책상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왜냐면 저 사람이 오기까지는 좀 시간도 걸리고… 회원증을 먼저 받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근데 완전히 푹 앉을 수는 없는 거죠… 속시원하지 않은 증명. 장희는 참을성을 갖고, 네에, 네에, 하면서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형구는 카메라 뒤로 돌아가 앉는다. 흔들리지 않는 의자. 치우는 아까와 달리 형구가 의자를 고정하기 위해 굳이 발을 세우지 않았다는걸 확인한다. “그런데 그 실종자가 대여자 명단에 있는지를 보려면, 몇 번 레인인지 보는 게 빠르니까, 한번 더 레인이랑 인원 수를 확인하려고 저기를 보구요…” 장희가 노력한다.

“음… 그 과정을 모두 거쳐야만 문자 확인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어… 한 번 해 볼게요…” 그 대답이 카운터 안팎의 모든 사람들의 인내를 싹둑 잘라버린 듯하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그쪽을 애써 피하고 있었기 떄문에, 그저 눈이 잠시 커지는 정도로만 드러나고 말았다. (쟤 뭐래니? 뭐하는 애니?) 장희는 침착하다. “아… 이게 안 될까요? 그럼 생략할 거 몇 개를 같이 정할까요?” 도윤은 아예 양 갈비뼈를 모두 카운터에 올리고 팔꿈치로 몸무게를 지탱한 채 매달려 있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면… 핸드폰을 보는 이유를 어떤 걸로 할까요…”

주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뒤에서 들리는 형구의 말.

“근데 핸드폰을 보려면 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 같은데?”

여기까지 모두 주현의 회고다.

주현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볼링장 상황을 약간의 상상을 덧붙여 떠올린다. 주현은 형구의 말 이후의 기억이 없다. 주현은 다시 회고하던 장면 안으로 들어간다. “근데 핸드폰을 보려면 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 같은데?”

주현은 장희를 지나 카운터 가장 안쪽으로 걸어간다. 안정적으로 펼쳐진 두꺼운 카메라 삼각대를 옆으로 넘어뜨린다. 잔 동작 없이, 튕김 없이. 한 번에 쿵. (제대로 세워진 삼각대는 웬만하면 넘어지지 않는다) 그 뒤에 앉아 있는 형구의 표정을 알 새도 없이, 주현은 앉아 있는 형구에게 올라탄다. 아까는 없었지만, 카운터 뒤로 남색에 붉은 줄무늬가 있는 라꾸라꾸 침대가 있다. 치우는 없다. 주현은 형구를 그 침대에 던져 눕힌다. 주현은 목과 어깨 쪽으로 형구의 목을 누른다. 레슬링 기술처럼. 형구의 입과 양 볼, 광대뼈를 덮은 가죽을 뜯어내려는 듯 입술과 이빨로 뜯고 씹는 주현. 그러다 왼쪽 귀로 넘어간다. 여전히 형구의 표정은 알 수 없는 채, 왼쪽 귀의 물렁뼈가 주현의 앞니로 잘근잘근 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