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품위를 사는 것은 존엄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강남구 압구정역 근처의 어떤 병원에서 레이저로 모근을 지지는 제모 시술을 기다리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그 대기실에는 싸구려 레이스로 된 침상 덮개와 “속까지 차오르는 아름다움”이라는 소위 ‘이쁜이 수술’ 광고 판넬이 놓여져 있었다.(이쁜이 수술이란, “여성의 질 내부에 필러를 넣어 성감을 높이고 여성의 자신감을 높여 주는 수술”이라고 한다) 그 방에서 제모가 필요한 부위의 옷을 벗고 그 위에 가운을 입은 채 대기하면 되는 거다. 나는 그 가운을 입은 상태로 앉아 있기가 꺼려졌기 때문에 6회 방문하는 내내 서서 기다렸다. 그 피부과는 피부질환 치료가 아닌, 레이저 제모 같은 미용시술만 하는 곳이었다. 화상을 입어도 진료받을 수 없는 피부과. 차례가 되면 침상에 누워 팔을 올리고 모근 지지는 소리를 듣는다.

병원에 깔린 가짜 대리석과 금빛 마감을 보고 싸구려라고 생각하는 나는 속물일까… 레이저에 시력이 손상되지 않도록 눈에 씌워주는 실리콘 가리개가 과연 소독이나 되었을까… 이 시술을 하는 사람은 매일 사람들의 겨드랑이 팔 다리 인중 음순 항문을 매일같이 쳐다보는 걸까… 그래도 나보다 훨씬 돈 잘 번다… 나나 걱정하자…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이런 거 받으러 올까… 와 같은 생각의 흐름은 6회 방문 내내 똑같이 반복됐다. 이 병원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과정은 나의 “존엄성”을 좀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아무도 모를 것이고 여튼 내 품위는 지켜질 것이었다.

왁싱을 하거나 제모를 하는 것은 현대인이 공공장소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도, 얼마나 더워도, 어떤 각도에서 사진이 찍혀도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성실하게 해두어야 하는 밑작업이다. 더워도 겨땀이 난 자국이 없어야 하고, 팔을 들어도 소매 안으로 보이는 털이 없어야 하며, 몸을 숙여도 뱃살이 접히면 안 된다.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예비) 찰나의 언-굴욕을 위해 미리미리 존엄성이 좀먹히는 “관리”(사실상 소비 행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를 해두어야 한다. 망가진 품위는 겉으로 드러나고 망신을 주지만 파괴된 존엄성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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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랄리 파르자의 영화 〈서브스턴스〉의 리지는 더이상 젊지 않다는 이유로 TV 에어로빅 프로그램 강사 일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뒤흔드는 불안에 시달린다. 외모적 아름다움이 곧 자신이며 그 품위가 곧 존엄성이다. 존재 보존을 위해 시작한 비밀스러운 세포분열 시술인 “서브스턴스”를 주사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선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서 리지는 미리 고지받지 않은 엄청난 통증을 겪고 타일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며 속절없이 쓰러진다. 척추를 덮은 피부를 마치 〈에일리언〉처럼 찢으며 리지의 “더 나은 버전”인 수가 태어난다. 리지의 몸은 탈피한 애벌레의 거죽처럼 화장실에 구겨진 채 방치되어 있다. 못생기고 늙은 몸이기에, 수는 리지의 몸을 질질 끌어 시야에서 치운다. 수가 된 리지는 단숨에 품위와 지위를 되찾으며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우받지만, “서브스턴스” 과정 내내 벌거벗은 채 타일 바닥에 뭉개진 채 엎어져 있다가, 깨어났을 때 찾아오는 고통과 자기혐오를 견뎌야 한다.

첨단의 기술을 활용한 시술일지라도, 여성들은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소비하는 행동 전반에서 자신의 몸을 평가하고,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을 학습하며 객체가 된다. 객체가 된 몸뚱이가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소모됨은 논외로 처리된다. 리지 또한 분명 “미국 소비자”인데 유독 이 산업에서는 권리 주장이 안 되고 있다. 여러 면에서 의도적으로 개연성을 덜어낸 이 영화는 핍진성이 가득하다. 신규 에어로빅강사 일에 지원하는 여성들은 합격하면 일자리와 댄스팀 센터라는 품위가 주어질 것이지만, 그 전까지는 “달릴 게 다 달려 있네”, “코 말고 가슴이 제대로 달리면 좋을 텐데” 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 실제로도 숏폼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종아리에 보톡스를 맞고 근육이 분해되어 걷지 못했던 경험이 숏츠로 편집되어 소비자 사이에서 재미있는 공감 썰로 수익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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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품위는 사야 얻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것이다. 존엄성은 지키는 것으로서 저항의 것이다.

예전 연인으로부터 네가 옷을 잘 입었으면 좋겠어. 멋있고 섹시했으면 좋겠어, 라는 말을 들은 것은 나의 몸에 들어와 저장되어 아주 천천히 존엄을 해쳤던 것 같다. 그 말에 나는 끝내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나는 거리에서 통유리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고, 결점을 발견하는 위주로 나를 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체 아닌 객체가 되어 시각적 대상으로 보게 되었고, 그 시각은 당연하게도 나에게만 향한 건 아니었다. 타인에게도 당연히 옮겨갔고, 그 전에는 의식하지 못하던 잣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눈에 들어왔다. 타인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인지되었지만 죄책감과 자기혐오만 생길 뿐 그 생각은 통제되지도 않았다.

더 오래 전에는, 리지가 프레드와의 약속시간을 앞두고 결국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처럼 나도 거울 속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약속에 늦은 적이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오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만, 문 밖을 나서는 그 간단한 행동이 어렵다. 수가 리지를 더욱 모질게 대하며 시야에서 치워두려는 것은 “시각적 품위”가 떨어지는 대상으로서의 나를 스스로 고립하는 행동이다. 늙고 주름지고 아픈 몸은 처박아두고 싶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존엄성은 품위와 달리 어디서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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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품위를 챙기는 것은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이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하는 것은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경하는 “있어 보이고 잘 배운 듯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8년 만에 돌아온 탄핵 정국과 그 이전의 많은 투쟁들에서 우리는 흥분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껍데기들은 폭력과 억압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 있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또다시 확인했다. 투쟁의 현장과 거리에서는 오늘 내가 그곳에 있게 될 지도 미처 몰랐던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진짜의 서툰 말을 한다. 많은 사인들은 어긋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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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한동훈의 말하기는 딱히 짐작할 수 없는 어떤 품위적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뜻도 힘도 알맹이도 없는 말을 느리게 끌고 당겨가며 나름의 무게와 품위를 챙기려는 연출을 한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 앞에서의 차분함은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품위이다.

집회에서의 말하기는 어떤가? 집회에서 발언하는 시민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 알지 못하는 타인의 존엄을 위해 앞으로 나가 두려움과 추위에 덜덜 떨면서, 때로는 눈물과 콧물이 차오르는 걸 조절하지 못하며 말한다. 자신의 품위는 뒷전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은 가끔 비문일 수도,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세련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올바르지는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이보다 연극적일 순 없을 정도로 우리를 몰입시키고 설득시킨다. 그들의 말에는 언제나 필연적 모순이 있고, 언제나 매운 유머가 생기며, 자신의 동지들에 대한 팔불출적 자랑의 순간에서 나오는 어설픔이 보인다. 그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의 소중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 어설픔을 더욱 사랑하고 지지하며 박수를 보낸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존엄을 찾을 수 있다. 흔들리는 말하기가 더욱 필요하다. 품위 없이 덜덜 떨며 말하는 존엄한 사람들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