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2학년이란 1학년 때 어느 정도 적응한 학생들에게 고3이라는 ‘무덤 기간’에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자율성이 주어지는 해였다. 그런 허용은 생활기록부에 채울 수 있는 다양한 교과 외 활동을 장려하는 일환이기도 했다. 문과 여자반인 5개 반끼리 생활기록부 독후감 란을 채우기 위한 독서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반마다 한 권의 책을 정해 학급 전체가 그 책을 구입해 읽고 독후감을 쓴 뒤 한 달 후에 그 책을 모두 뒷 반으로 넘기고, 또 앞 반으로부터 새로운 책을 넘겨받아 읽는, 책 돌려 읽기 같은 거였다. 1반부터 5반까지, 출석번호가 같은 애들이 각자의 책을 돌려 보는 식이다. 국어 선생님들이 정한, 딱히 재밌지도 특색있지도 않은 무난한 책들이 선정되었다.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하는 프로젝트들은 다들 큰 불만 없이 책 한 권씩을 사서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따르기도 하는 법인데, 내가 반장이던 그 해 그걸 알게 되었다.
네 번의 돌려 읽기가 끝나고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책이 각자의 반으로 돌아오는 달이었다. 쉬는 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는데, 옆 반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들여다보니 그 반의 거의 모든 애들이 한가운데에 있는 누군가를, 거의 교실 넓이만큼이나 큰 원으로 둘러싸고 각자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는데, 꽤 험악한 분위기였다. 가운데 서서 혼자 뭔가를 항변하고 있는 애는, 자세히 보니 우리 반의 슬기라는 애였다.
슬기는 초롱초롱한 눈에 도톰한 쌍꺼풀이 지고 일자 앞머리를 내리고 다녔다. 좌우가 똑같이 대칭인,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마른 몸에 적당히 큰 교복을 입고 다녔다.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애의 종아리였다. 슬기와 말을 섞어본 적도 별로 없고, 솔직히 말하면 그 애를 피하면서도 그 애를 몰래 쳐다보곤 했기 때문에 뒷모습을 기억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 애의 종아리는 사람의 살 같다기보다는 탄력있게 단단한 두 가닥의 고무막대 같았다. 슬기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슬기는 1학년 때도 나랑 같은 반이었다. 우리 학교는 경기도의 각 지역에서 지원해 오는 학교였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같이 진학하는 경우는 드물고 각자의 지역에서 한두 명씩 입학했다. 다들 데면데면하고 서로에 대한 경계도 있는 가운데 첫 전국 모의고사를 치르며 학교성적 또한 잘 받아야 한다는 긴장감이 있었다. 친구의 수상 실적이나 방학 체험학습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분위기, 선생님이 누군가를 교무실로 오라고 했을 때 “왜 부른 거지? 왜 난 안 부르지?” 하고 궁금해하는 분위기, 서로의 등수를 추측하기… 그런 환경은 친구 사귀기를 분명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렇게 좁은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3년을 보냈다.
그런데 슬기는 1학년 때부터 경주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슬기는 내가 못난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 그런 노력을 단 한 톨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친구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도, 아무도 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자원을 받을 때도, 언제나 특유의 재빠른 몸짓과 말투로 “그거 수행평가에 들어가는 거 아니죠?” 같은 간결한 사실확인 후 쌩 하고 지나쳤다. 한번은 빵을 좋아하는 애가 외출증을 받아 어렵게 나가서 사온 세 개의 크림 슈를 아무도 달라고 하지 않을 때, 앞 자리에 앉은 슬기가 휙 하고 뒤를 돌아 정적을 깨고 우와, 나 하나만! 고마워! 하고는 제 책상으로 휙 돌아간 적이 있었다. 사소하지만 그 애의 얌체 같은 행동은 허를 찌르는 데가 있었다. 나는 슬기와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고, 겹치는 일도 없었지만 고백하건대 그 애의 목표(만) 지향적인 태도가 같은 반인 2년 동안 나를 번뇌에 빠지게 한 경우는 정말 많았다. 그때는 그 애가 못되고 얄미워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아무 눈치 안 보는, 경쾌하리만치 가벼운 결정과 행동들에 일단은 감탄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애를 동경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슬기가 옆 반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갈색빛으로 예쁘게 드는 낮이었다. 몰려 있는 인파를 뚫고 교실 한복판 쪽으로 가는데 역광으로 애들이 어둡게 뭉쳐 보였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슬기 옆에 가서 잠시 정신을 차리자 그 애를 둘러싼 화난 얼굴들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격앙된 목소리들이 뭔가를 맹렬히 따지고 있었다. 슬기도 만만찮은 크기로 대응은 하고 있었는데, 숨이 가빠 보였다.
이 상황을 일단은 중단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내 입에서 “얘들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로 시작하는 말이 나오다 얼마 안 가 눈물이 터졌다. 으아앙, 같은 소리를 냈던 것 같다. 어리광에 가까운 소리였다. 결국 나는 그 애의 팔을 잡고 분노로 가득찬 그 반을 나올 수 있었다. 우리 반으로 왔을 때 나는 다시 안전한 느낌을 받았고, 새삼 내가 방금 엄청 우발적으로, 감정적인 소리를 냈다는 자각에 좀 얼떨떨했다. 슬기와도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우리 반 애들도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날 수업이 다 끝나고 담임이 나를 불렀다. 교무실이 아닌 상담실로 오라고 했다. 담임은 평소처럼 의도를 알 수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거기서 왜 울었어.” 의외였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그런 반 대항(?) 싸움이 일어나게 된 건지, 너는 그런 걸 왜 몰랐는지 같은 책망 섞인 질문을 예상했다. 왜 울었냐?
나도 몰랐다. 나는 슬기를 미치도록 싫어했다! 내가 슬기를 위해 울었을 리는 없고, 그냥 들여다본 옆 교실 안, 강강수월래만큼 큰 원 안에 한 명이 둘러싸여 욕을 먹고 있는 그 광경 자체가 너무 스펙타클해서? 무슨 영웅심리였는지, 그 한 명이 우리 반 애인 걸 안 순간 들어가서 개입해야 한다고 느껴져서? 안 그러면 나중에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머리만 굴렸다. 아무래도 담임에게 말할 수 있는 명확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걔네들이… 둘러싸고 화를 내고 있어서… 당황했던 것 같아요…” 라고 말하자 담임은 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옆 반 반장에게 그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전말은 이랬다. ‘책 돌려읽기 활동’ 중에 슬기가 그 반 학생의 책을 잃어버렸다. 슬기는 책을 새로 사서 그 친구에게 돌려주는 대신 학교 도서관에 있는 똑같은 책을 가지고 나와 표지에 붙어 있는 도서관 바코드 스티커를 떼어냈다. 그러나 책의 두께 부분에 찍힌 “OO고등학교 장서”라는 도장은 지우지 못했다. 그 반 학생의 말에 따르면, 슬기에게 몇 번이나 요구해 겨우 돌려받은 책은 낡은 표지에다 책 두께 부분에 “OO고등학교 장선영♡정슬기”라는 낙서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반 애들이 슬기에게 찾아가 이거 도서관 책 아니냐고 따지자 슬기는 “장선영”이라는 친구 거다, 라고 변명을 했고, (학교에 장선영이라는 애는 없었다…) 그날 그 반 애들은 계속돼 온 슬기의 거짓말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날을 잡고 분풀이를 하던 거였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 반 반장과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를 내가 그 반 반장으로부터 넘겨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 애도, 이 일을 슬기가 직접 해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애와 두 번, 슬기와 한번,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일은 어찌저찌 처리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 나온 울음이 퍼포먼스성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냥 그 교실을 둘러싼 거대한 분노에 압도되어 나온 순간적 흥분. 나는 평소에도 눈물이 더럽게 없는 편인데? 신기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 슬기가 안타까웠던 건 사실이다. 언제나 자기 할 일에 악착같이 집중하고 흔들리지 않던 그 애가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공격에 항변하는 모습이 분명 힘에 부쳐 보였다. 그래서 그 교실 안에 들어갔던 거였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 애를 돕기 위해 들어간 걸까? 혹시 나는 그 애가 흔들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일의 전말을 알고 나서는? 잠깐이나마 슬기를 안타깝게 여긴 내가 우스워졌다.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한 행동이라니! 나는 충격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 번 정도는 감탄하지 않았을까? 정말 싫고 얄미운 애가 이런 짓까지 벌일 수가 있나! 당시에는 이상하다고 여겼던 담임의 질문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중요해졌다. 나는 왜 울었는가?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반 친구들끼리 얘기하다 누군가 말했다. “담임이 반장 엄청 좋아하잖아.”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럴 리가.” “담임이 나랑 상담할 때 얘 반만 닮아봐라’고 말했어.” 담임은 언제나 내가 너무 “나댄다”고 하곤 했었다. 담임은 내가 슬기를 감싸 준 착한 애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내가 그 애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그 애를 음침하게 신경쓰면서도 그걸 숨겼다. 내가 끝내 미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그 애가 악착같은 것에 비해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였다. 그 애에 대한 질투가 끓는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뿐이다. 졸업할 즈음에는 그 애가 살던 고시원 사장님과 싸우고 나오며 방의 전기 선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때쯤 나는 슬기를 몰래 궁금해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느 면에서는 일관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졸업하고 나서도 나는 가끔 슬기의 이름을 페이스북에서 찾아보곤 했다. 서핑 선수인 듯한 정슬기의 소식이 대다수였다. 그게 슬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굳이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슬기는 SNS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일관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끝내 솔직하지 못하게 대했던 슬기가 잘 지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