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까지 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주문이 밀렸는지 앞 순서의 음료가 나오는 것만 해도 한참 걸렸다. 나는 얘기를 시작하자고 했지만 너는 차가 나오면 하겠다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만 해도, 네가 평소 ‘삐졌을’ 때 나오던, 인중이 길어지며 입이 살짝 삐죽거리는 표정이 보여서 나는 이번에도 마음이 좀 상했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고, 나는 내 주특기인, 한숨을 쉬거나 눈알을 굴리거나 고개를 왠지 모르게 불량한 각도로 기울이는 등의 행동들을 통해 이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걸 아주 조금씩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드디어 차가 나왔다. 나는 숨이 트일 것 같아서 일부러 "감사합니다!" 라고 조금 크게 말했는데, 오히려 평소 카페의 직원들에게 언제나 목례하며 음료를 받던 너는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어.” 라고 너는 말했다. 순대국 먹다 싸워서 다음날 만나 헤어지는 마당에 그렇게 정돈된 말로 체면을 차리고 싶은 건지. 그 찰나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나도 분명 이별을 고려 중이긴 했다. 이렇게는 더 못 만난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부딪치고, 그 다툼의 빈도와 수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견디기 힘들었다. 너는 곧이어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했어.” 라고 했는데,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때 너의 입술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래도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라며 너는 다시 예의를 차렸다. 분명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말을 꺼낸 네가 미워서 한 마디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 싸울 때완 달리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네가 정말 이런 식으로 쉽게 관계를 정리하려 하는 거라면 한 마디도 해주기가 싫었다. 고마웠어, 미안했어, 혹은 헤어지기 싫어, 라던지 그 어떤 말이라도. 너는 네가 주문한 카모마일 차만 계속 마셨다. 뜨거웠을텐데, 너는 손에서 컵을 놓기가 무섭게 연신 차를 마셨고 차는 금방 줄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 저녁을 먹던 날, 우리는 음식 한 접시에 와인 한 잔씩을 주문해놓곤 어색하고 긴장한 탓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묻고, 듣고, 또 묻고 하느라 음식에 손을 댈 틈이 나지 않았다. 와인을 다 마시면 곧 일어나야 할 것만 같아 야금야금 아껴 마셨고, 너도 그런 것 같았다. 결국 더 아껴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잔이 비었을 때 내가 한 잔씩 더 주문하자고 했고, 우리는 기쁘게 그렇게 했다. 그 식당은 와인을 주문할 때마다 진열된 특이한 잔들을 고를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는데, 너는 직원 분에게 굳이 새 잔을 준비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그건 사실 그 식당의 친절하고 재미있는 방침이자 매뉴얼 같은 거였는데, 직원분이 일을 두 번 하게 될까봐 굳이 사양하는 너를 보고 나는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재밌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나는 새로운 잔을 고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여튼. 우리는 두 번째 와인도 야금야금 아껴 마셨다. 한달쯤 후에 우리는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너도 그 와인 아껴 마셨냐며, 우리 생각이 똑같았구나, 하며 즐거워했다. 행복할 때는 모든 게 다 우리를 위한 것처럼 잘 들어맞고, 잘 통하기만 한다.
그런데 그날의 너는 뜨거운 차를 무섭도록 빨리 없앴다. 내가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못내 할 말 없냐고, 물어볼 건 없냐고까지 몇 번 물었고 시위하듯 앉아서 고개만 젓는 나 때문에 또다시 삐졌을 수도(헤어지는 마당에 삐진다는 표현은 미안하다), 부아가 났을 수도, 분했을 수도 있다. 너는 결국 잔의 바닥을 보기도 전에 그럼 일어나자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먼저 가, 라며 가방에서 네가 읽으라고 빌려 줬던 책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네 쪽으로 쭈욱 밀었다. 마지막 손짓만은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아마 너는 한번 더 상처받았을 것이다. 너는 조금 거칠게 가방에 그걸 넣는 것 같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잠깐 눈을 마주치고, 너는 빠르게 카페를 나갔다. 반쯤은 예상했고(그래서 책을 챙겨 나왔다), 반쯤은 방심했던 헤어짐이었다.
애인이 생겼을 때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렇게 우습게 관계가 끝나는 경우에 그 낙차감을 느끼기 싫어서였다.
사랑한다면서 안달하던 관계는 며칠 만에 저주하는 관계가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성질이 더러울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의 성질을 긁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룻밤만에 관계를 종료하기로 결정해 통보한 건 너다. 예전에 임권택의 “씨받이”에 대한 평론가 정성일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하고 싶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다시 노력해보고 싶어, 라는 말과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는 두 가지 말이 동시에 하고 싶은 것이다. 미워! 사랑해. 그래, 가라! 고마웠어. 죽어 버려! 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