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간의 독립영화 촬영 현장. 하루가 지날 때마다 스탭들이 한 명씩 사라진다. 돈도 안 받겠다, 나도 이탈하고 싶지만 그럴듯한 명분이 없다. 중간에 그만두면 순식간에 도망간 애로 소문이 날 것이다. 며칠 전 현장에 왔던 ‘분장님’은 (분장팀장님을 줄인 말인데, 분장팀에는 분장팀장님 뿐이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지금 “개 빡쳐” 있어서 자신이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걔가 여기까지 와서 다 뒤집어 엎을 거라며, 출근하자마자 30분 만에 귀가했다. 나는 여기서 굳이 데이트폭력을 떠올리지만, 오지랖을 부리는 건 사치고, 괜히 욕을 먹을 수도 있다. 군더더기 없이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분장님은 엄청 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시군요, 가십시오. 남자배우들의 얼굴 상처 분장 정도만 연출부들이 때우면 된다.
일요일인 오늘은 제일 큰 씬을 찍는다. 밤, 폐건물 창고 앞 공터에서 남자 셋, 여자 하나가 얽혀 싸우는 장면이다. 사실 이곳은 주택가에 근접한 학교 건물 공터다. 실제로는 “# 밤/주택가 공터”씬인 것이다. 배우들은 발성이 우렁차다. 완전한 밤이 되고서도 용케 몇 시간을 찍었는데, 역시나 성난 주민 한 사람이 나와 항의를 한다. 30대 남성인 그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밤에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지당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다. 우리(연출부들)는 그저 맞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반복할 뿐이고 촬영을 중단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애매한 사과만 이어지자 그의 화는 격해진다.
온 사방에 쳐둔 오렌지 조명이 밝고, 그 아래서 그가 큰소리를 낼 때마다 나오는 미세한 침방울들이 공기 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느리게 착지한다. 몇몇은 내 얼굴, 눈 아래 광대뼈를 덮은 피부에 안착한다. 여름인데도 바짝 건조해진 얼굴에 미세한 침방울이 닿자 촉촉하게 느껴진다. 크게 불쾌한 건 아니다. 이 민원이 언제쯤 끝날지 가늠이 안 될 뿐이다. 감독과 피디는 언제까지 안 내려오고 지들끼리 떠들고 있을까? 언제까지 이 성난 사람을 몸빵해야 할까? 그냥… 죄송한 얼굴을 보이며 앞에 서 있을 사람이 필요한 거다. 어떤 해결도 못 하는.
그날의 일은 분노를 안면으로 받은 경험임에도 모욕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적인 성향 탓일까?) 당신들은 도를 넘는 소음을 발생시켰다. 잠 좀 자자. 그는 맞는 말만 했다. 마땅한 해결책(촬영 중단 및 재발 방지)을 약속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이 나의 몸과 정신을 분리시켰다.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일을 [그냥] 해야 하는 경험들이 나를 현실과 떨어지게 만들었고, 더이상 그런 식으로 일하기가 어려웠다.
“누가 일요일 밤에 주택가에서 몇 시간을 고성을 지르고 싸워? 바로 민원 들어오지.” 쉬는 시간에 농담 삼아 이런 말이 오가면, “우리 영화는 장르영화니까 괜찮다”고 말하는 것까지가 당시의 동료들 사이에서 정해진 문답 같은 것이었는데, 여기서의 “장르영화”는 ‘개연성 부족이 보완될 만큼의 극적 재미가 있는 영화’라는 뜻이었다. 정말 그랬나? 그냥 ‘상업영화를 찍고 싶은데 그만큼의 돈은 없는 영화’에 가깝지 않았나? 반면, 우리 영화의 돈 없음과 여건 없음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기술적 구현이나 장소 섭외가 어려운 장면은 깨끗하게 포기하며, 각자가 잘하는 분야에 집중해 측면돌파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야기와 인물들, 그리고 이 팀의 크루들이 딛고 있는 바닥과 계속 연결되어 있으려는 현장에서는 크게 괴롭지 않았다. 꾸며내거나 가릴 때의 민망함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베르너 헤어조크(1942~)는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 극점에 있는 사람들, 위험한 공간들에 주목해 영화를 만든 다큐멘터리스트이자 극영화 작가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12년이었다. 영화를 통해 본 그 역시 무모하고 위험하며 어느 의미에서든 극점에 있는 사람 같았다. 지금은 80대에 접어들었다. 헤어조크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일화는 이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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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젊은 시절, 동료 에롤 모리스가 돈이 없어 영화를 못 찍겠다고 하자 헤어조크는 “네 영화를 완성하면 내가 구두를 먹겠다”고 내기를 걸었고, 그 후 에롤 모리스가 (헤어조크의 표현)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훔쳤는지 모르겠지만(still a mystery he’d borrowed money everywhere and he stole…)” 영화를 완성하자 기념 상영회 자리에서 청중을 앞에 두고 축사를 한 뒤 냄비에 쪄온 구두를 잘라 먹었다. 〈베르너 헤어조크 구두를 먹다〉(1980)
B. 정신적 지주였던 비평가 로테 아이스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헤어조크는 뮌헨에서부터 파리까지, 8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갔다. “도착하기 전에 가시면 안 된다, 절대 못 가신다(I did not want to allow her to die, she will not die, she must not die)” 라는 일념으로. 나침반을 들고 순례를 떠난 것이다. 며칠 후 만난 아이스너는 건강을 되찾았는데, 8년 후, 80세를 훌쩍 넘긴 그가 다시 건강이 나빠졌을 때 헤어조크에게 농담처럼 “주문을 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헤어조크는 요청에 응하고, 8일 후 아이스너는 세상을 떠났다. 1896년생인 아이스너는 나치 집권 때 프랑스로 망명해 활동했으며, 패전 이후의 독일 감독들이 “고아 세대”로서 고립되어 있을 때 유럽에 독일 감독들을 소개해 후의 “뉴 저먼 시네마”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준 소중한 동료였다. 〈베르너 헤어조크-필름메이커〉(1986)

C. 광인으로 알려진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와 헤어조크는 15년에 걸쳐 5편의 영화를 같이 만들었다. 헤어조크는 〈아귀레, 신의 분노〉와 〈피츠카랄도〉를 찍을 때 없는 예산에도 남미 아마존 강 근처에서 머물여 각종 질병과 사고를 겪었고, 그 열악함이 킨스키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더 증폭시켰다. 킨스키가 성격을 못 이겨 원주민 배우와 말에게 주먹질을 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나의 친애하는 적〉, 〈버든 오브 드림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킨스키가 칼을 든 손으로 헤어조크의 목을 조르는 사진은 이 둘의 가장 유명한 사진이며, 헤어조크도 날뛰는 킨스키에게 총을 겨눈 적이 있다. 이 둘을 지켜보던 현지인 배우가 헤어조크에게 킨스키를 죽여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배우를 죽이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킨스키가 사망하고 22년 후*인 2013년, 자녀인 폴라 킨스키가 자서전을 통해 친부로부터 오랜 기간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시의 현장에 대한 글을 찾아보다가, 열악한 환경 탓에 현지에서 고용한 노동자들이 “미쳐버릴 테니(would go crazy in the jungle)”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성노동자를 고용하라는 현지 가톨릭 신부들의 조언을 들었고, 헤어조크의 현장에서 그렇게 했다는 기록을 읽게 되었다. 크루 한 사람이 마취 없이 응급수술을 받는 상황에서 현장에 고용된 성노동자 한 사람이 곁을 지켰다는 기록도 있다.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자리가 있다면, 지금도 나는 아마 가서 보겠지만, 그의 극영화들은 유독 괴로웠다. 굳이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극한의 인간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극한의 모습으로 기행을 벌이는 인상으로 남아 있다. (킨스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힘있는 배우다) 헤어조크의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상당 지분을 차지하는 킨스키의 끔찍한 행동들(주먹질, 멱살잡이 등)을 보면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마음 속에서 분서갱유를 하거나 언급을 꺼렸던 (구)최애 영화들과 화해하려던 계획이 다시 미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금 〈피츠카랄도〉 관련 기사에서 현지 노동자들이 질병/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알게 됐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현지인 단역배우와 노동자들인데, 이 영화는 유럽 영화이자 헤어조크와 킨스키의 영화다.